나이가 들어도 성장을 거듭하고 번식력까지 커지는 바닷가재. 비결은 끊임없는 ‘껍질 벗기’(탈피)다.
나이가 들어도 성장을 거듭하고 번식력까지 커지는 바닷가재. 비결은 끊임없는 ‘껍질 벗기’(탈피)다.
‘나이 예순이면/ 살 만큼은 살았다 아니다/ 살아야 할 만큼은 살았다/ 이보다 덜 살면 요절이고/ 더 살면 덤이 된다/ 이제부터 나는 덤으로 산다.’

지난 9일 타계한 김광림 시인의 시 ‘덤’의 앞부분이다. 1989년 펴낸 시집 <말의 사막에서>에 실린 이 시에는 ‘덤을 좀만 누리다’ 간 김종삼 시인(63)과 ‘진작 가버린’ 이중섭 화가(40), ‘쉰의 고개턱에 걸려’ 주저앉은 조지훈 시인(48), ‘일찌감치 숟갈을 놓은’ 김소월(32), 이상(27)이 등장한다.

김광림 시인은 예순을 삶의 분기점으로 보고 이보다 덜 사는 것은 ‘요절’이요, 더 사는 것은 ‘덤’이라고 했다. 95세로 세상을 떠난 그에게 ‘덤’의 삶은 35년이었다. 이 기간에 그는 쉬지 않고 정진하며 더 깊고 넓은 시의 세계를 열었다. 한국시인협회장을 맡아 우리 시의 국제화까지 일궜으니 여생의 ‘덤’에서 성찰과 지혜의 꽃을 가득 피운 셈이다.

60세 이후 새로 피워 올리는 꽃

인간의 평균수명은 인류 역사의 99.9% 동안 20세를 넘지 못했다. 중세까지도 35세에 불과했다. 20세기 중후반에 태어난 사람들은 20세기 초반 태생보다 줄잡아 30년은 더 산다. 우리 사회의 은퇴 연령은 대부분 60세다. 이 나이를 지나고도 한참 더 살아야 한다. 이처럼 길게 주어진 ‘덤’의 시간에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덤’의 옛말은 ‘더음’으로, ‘더하다’는 의미의 ‘더으-’에 접미사 ‘-음’이 결합한 것이다. 그 자체로 플러스의 뜻을 갖고 있다. 발음은 1음절로 짧지만 내포된 의미는 길고 크다. 이를 내 삶에 접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보다 통념의 겉껍질을 벗고 새로운 생각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한다. 데미안의 ‘알을 깨고 나오는 새’처럼 기존의 세계를 깨뜨리고 거듭나는 게 중요하다.

바닷가재는 나이를 먹을수록 성장을 계속한다. 수명이 40~50년에 이르고 100년이 넘는 경우도 있다. 여느 생물체처럼 세월 따라 노화하는 게 아니라 죽을 때까지 성장한다. 갈수록 힘이 세지고 번식력도 커진다. 그 비결은 끊임없는 ‘껍질 벗기’(탈피)다. 어린 바닷가재의 몸통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껍질보다 커진다. 딱딱한 껍질 안에 속살이 꽉 들어차 견딜 수가 없다. 이때 자신의 등갑을 쪼개고 스스로 껍질을 벗는다. 속살을 감싸고 있던 껍질이 떨어져 나가면 그 안에 있던 분홍색의 얇은 막이 더 크고 딱딱한 껍질로 자란다.

방금 탈피한 바닷가재의 갑각은 부드럽다. 공격받기 쉽다. 생존환경으로 보면 가장 위험한 시기다. 그러나 이 과정을 거쳐야 몸집이 커지고 힘도 강해진다. 탈피할 때마다 새로운 근육 세포가 생긴다. 기네스 세계 기록에 따르면 가장 큰 바닷가재는 캐나다에서 잡힌 것으로 무게가 20.15㎏이나 된다. 복부(꼬리) 근육질까지 잘 발달해서 급히 도망칠 때 꼬리를 튕겨 초속 5m까지 몸을 날릴 수 있다. 수심 3000m, 영하 44도에서도 살 수 있는 생명력이 이런 데서 나온다.

매미가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모습.
매미가 껍질을 벗고 새로 태어나는 모습.
육지에 사는 곤충도 대부분 ‘탈피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이를 변태(變態·본래의 형태가 변해 달라짐) 또는 ‘탈바꿈’이라고 한다. 나비와 꿀벌, 파리, 모기 등은 알-유충-애벌레-번데기-성충의 5단계를 거치며 탈바꿈한다. 매미와 사마귀, 노린재, 메뚜기, 잠자리, 바퀴벌레 등은 번데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애벌레 단계에서 허물을 벗고 성충이 된다. 파충류는 물론이고 식물까지 탈바꿈을 통해 거듭난다.

탈피는 생물에게 매우 고된 과정이지만 꼭 필요한 성장통이기도 하다. 성장주기에 따라 탈피 시기는 다르다. 곤충은 유년기에 빠르게 여러 번 탈피하며 몸을 크게 키우고, 파충류는 대부분 1년에 한 번 정도다. 곤충 등의 외골격이 손상됐을 경우 탈피 과정에서 재생되기도 한다. 심지어 다리가 잘리는 등의 심한 손상까지 어느 정도 회복된다.

우리에게도 스스로 껍질을 벗는 과정이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나이를 먹는다고 뇌세포가 줄어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낯선 모험을 감행하면 새로운 세포와 수상돌기, 신경망이 생긴다. 20세기 첼로 거장 파블로 카살스가 95세에도 매일 6시간씩 연습하며 “지금도 조금씩 발전하는 것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을 떠올려 보자. 미국 법학자 올리버 웬들 홈스가 “아흔 살 넘어서 무슨 그리스어 공부냐?” 하는 질문에 “지금 아니면 영원히 못 하지 않겠냐”라고 답한 일화도 흥미롭다.

잠들어 있는 내면의 나를 깨워라

80세에 ‘지금도 나는 배운다’(왼쪽)를 그린 고야.
80세에 ‘지금도 나는 배운다’(왼쪽)를 그린 고야.
날마다 성장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 스페인 화가 고야는 80세에 그린 그림의 제목을 ‘지금도 나는 배운다’(1826)라고 붙였다. 죽음을 2년 앞둔 시기에 목탄으로 그린 이 소묘는 허리가 굽은 백발노인이 지팡이를 두 개나 짚을 정도로 몸이 불편한데도 꿋꿋한 자세와 형형한 눈빛으로 배움의 걸음을 내딛는 모습을 담고 있다. 생의 마지막 여정에 도달한 이 시점에도 고야는 새로운 석판화 기법을 배우며 화풍의 변화를 꾀했다.

나는 어떤가. 나이를 먹으면서 탐구심을 잃어버리지는 않았는가. 어릴 적 그토록 뜨겁던 호기심과 경이로움은 어디로 갔는가. 태어나서 여섯 살 때까지 습득한 지식의 양은 그 뒤에 교육으로 얻은 지식보다 훨씬 많다고 한다. 유년기의 질문과 관찰로 체득한 지식은 교과서를 능가한다. 그런데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감탄 어린 질문과 배움의 자세를 잃고 만다. 오래된 습관과 일상의 안일함에 갇히면 성장이 멈추거나 퇴보하기까지 한다.

배움에는 끝이 없다. 우리는 세월 따라 늙는 것이 아니라 매일 새로워질 수 있다. 인생의 ‘덤’은 시간이라는 선형적 개념뿐만 아니라 배움이라는 입체적 개념을 아우르는 말이다. 예순을 넘어서도 가슴 뛰는 열정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성장의 꽃을 피울 때 진정한 ‘플러스 인생’을 펼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낡은 껍질을 깨야 한다. 스스로 알을 깨고 나와야 한다. 오래도록 깨워 주기만 기다리며 잠들어 있는 내면의 나를 깨워야 한다.